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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정적] 패기(霸氣)

입력
2017.11.06 15:5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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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旅程)에서 건너뛸 수 없는 구간이다. 여정은 여행(旅行)과 다르다. 여행은 재미나 학습을 목적으로 떠나,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구경하러 갔다가 다시 자신이 안주하는 집으로 돌아오는 행위다. 그러나 여정은 자신이 정한 원대한 목표를 향해, 매 순간 한 걸음씩 거길 향해 다가가는 수련이다. 인생은 자신이 지정한 목표점을 향해 조금씩 달려가는 마라톤이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연마하지 않은 사람은, 42.195km를 완주할 수 없다. 마라톤으로 평상시에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10km 지점도 버겁다. 마라톤 선수에게 28~30km는 심장이 터질 정도로 힘든 마의 구간이다. 그러나 그는 42.195km라는 분명한 목표점이 있고, 마의 구간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기에 이를 극복해 낸다.

나는 오늘 하루도 주어진 삶의 중요한 도약의 발판으로 만들고 싶다. 오늘이 내가 원하는, 그리고 내게 감동적인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정이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취해야 할 전략은 무엇인가? 나에게 쏜 살처럼 달려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련한 과거가 되어 버리는 이 시간을 나는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내가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대하는 두 가지 삶의 태도가 있다. 하나는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다. 오늘 일어나는 사건과 만나는 사람은 무방비 상태의 나를 정신 없게 만들어, 나는 결국 오늘이란 시간의 노예가 될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목표를 향해 묵묵히 달려가기 위해,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고유한 임무를 ‘선택’해 완수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제3자가 되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나를 독려할 것이다.

고대 로마시대 스토아철학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욕망을 부추기는 다양한 유혹, 예를 들어 자신의 명성(名聲)엔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완성하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예술작품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몰입하였다. 그들은 두 가지를 자문했다. 삶에 있어서 숭고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가치를 자신의 영혼과 몸의 자양분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효과적 전략은 무엇인가? 그들은 정적(靜寂)을 한번 주어진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여겼다. 정적을 최고의 목표로 삼은 다른 사상도 있다. 일본 선불교나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철학도 정적을 최선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스토아철학을 수련하는 사람은 이들과는 다른 전력을 사용한다. 선불교에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욕심을 감지하고,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생각과 형상을 관조하고, 그것들을 흘려 보내는 좌선(座禅)을 수련한다. 좌선이 선불교 수련자에게 정적이다. 고대 그리스 에피쿠로스 사상가들은 자신의 삶에 쾌락을 주는 것을 만끽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간소화하며 삶에 기쁨을 주는 우정과 묵상을 실천한다.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전략은 다르다. 그들은 정적에 도달하기 위해, 특별한 마음을 지녔다. 그들은 이 마음가짐을 라틴어로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에 대한 예모(豫謀)’라고 명명하였다. 후기 스토아 철학자이자 제정 로마의 재상이었던 세네카는 자신이 여행을 기획할 때,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상상한다. 폭풍우가 갑자기 불어 닥칠 수 있고 배가 파산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자에겐 예상 밖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의 마음가짐을 패기(霸氣)라고 정의하고 싶다. 패기는 밤하늘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달이다. 달은 만물이 활동하는 낮에는 해에게 자리를 내주어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살포시 나와 자신을 더 하늘 위에 띄워, 바다 한 복판에서 해로를 잃은 선원에게 길을 알려주고, 끝없는 사막에서 헤매는 대상무역상에게 시간을 알려준다. 달은 현재의 자신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시간에 따라 완벽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약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완벽한 모습으로 스스로 변화한다. 달은 자신을 비울 줄 안다. 완벽한 보름달의 모습을 애태우면서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완벽한 모습을 다시 부숴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간다. 비움과 채움이 달에겐 하나다. 패기(霸氣)라는 한자가 신기하다. ‘패(霸)’자는 비(雨)가 우수수 내리는 한 밤에 달(月)이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으로 어제를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 혁신(革)하여 변화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혁신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자리를 떠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과거로 회기시키려는 모든 잔재를 완벽하고 섬세하게 제거할 때 성공한다. 패기를 지니는 자는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으로 적절하게 변신하며, 자신이 가야 할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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