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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당한 오키나와, 그들은 왜 일본 복귀를 원했나?

입력
2022.08.06 04:40
수정
2022.08.06 13:0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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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오키나와 반환 50주년을 돌이켜 보다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우치난추’는 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이다.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스스로를 ‘우치난추’ 라고 부른다. 사진은 @SEIMORI( Pixabay), 일러스트는 김일영

‘우치난추’는 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이다.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스스로를 ‘우치난추’ 라고 부른다. 사진은 @SEIMORI( Pixabay), 일러스트는 김일영

◇아름다운 휴양지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인 오키니와의 속사정

오키나와(沖縄) 하면 아름다운 남국의 휴양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일본 열도 남서쪽에 자리한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인데, 사시사철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아열대성 기후와 수려한 자연환경, 문화유산 등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일본인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관광지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현대사 속에서 오키나와가 겪은 시련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도 일본에 오래 살면서도 오키나와의 복잡한 속사정에 대해 무지했다. 미일 군사 동맹의 전략적 요지로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든가, 주둔 미군과 주민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등의 보도는 종종 접했다. 하지만 일본 매스미디어에 주로 등장하는 오키나와의 이미지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깨끗한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더없이 아름다운 해변가, 젊은이들이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여행지, 이국적인 외모가 특징적인 유명 연예인의 출신지 등 대중매체에 그려지는 오키나와는 여유와 기쁨이 넘치는 파라다이스였다. 그런 매혹적인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오키나와에서 즐기는 휴가를 꿈꾸곤 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문화 연구자나 사회 운동가들과 깊이 교류하면서 비로소 오키나와 지역의 아픔과 복잡하게 뒤엉킨 정치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오키나와라고 부르는 지역의 여러 섬들이 힘을 합쳐 13세기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15세기에는 류큐(琉球) 왕국이 세워졌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한반도 등 동아시아 강대 세력들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독자적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류큐 왕국은 1879년 일본에 합병되기까지 450여 년 동안 독자적인 언어와 풍습을 가진 독립적 국체를 유지했다. 문화적으로도 일본 본토보다는 중국 대륙이나 동남아시아 문화권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의 향토 요리는 돼지고기 등 육류를 푸짐하게 볶거나 뭉근히 끓이는 조리법이 많다. 해산물을 사용하는 담백한 일식보다는 중식이나 동남아시아 요리에 더 가까운 것이다. 또 흥겨운 리듬이 특징적인 음악이나 전통무용 등도 일본의 절제된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로 보나, 문화로 보나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와는 분명히 다른 루트를 걸어왔다.

◇일제 패망 후, 오키나와는 왜 일본 귀속을 원했을까?

일제시대,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은 고유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일본식 생활 습관을 억지로 강요당하는 이른바 ‘동화 정책(同和政策)’의 대상이었다. 도쿄나 오사카 등에 “오키나와 사람과 조선 사람은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식당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피지배민족으로서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이 받은 차별과 멸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꿈에 그리던 독립을 얻었지만,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일제시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주권을 포기한 그들의 선택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키나와는 왜 다시 일본에 귀속되기를 원했을까?

일제시대는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과 수모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보다도 더 고통받았다. 특히,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오키나와에서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지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기를 이용한 공중전이 대부분이었던 태평양전쟁에서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진 대표적 전장이었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 것보다도 미군 병력을 최대한 소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전술을 펼쳤다.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출하는 사태에 대비해 적군의 군사력을 가능한 한 약화시키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는데, 사실상 오키나와 주민들을 미군의 총알받이로 내몬 잔인한 전술이었다. 미군 첩자로 의심을 받은 오키나와 사람이 살해되는 일도 잦아서, 주민들 사이에는 미군보다도 일본군이 더 무섭다는 말도 나돌았다. 3개월가량 계속된 치열한 지상전에서 오키나와는 초토화되었고, 군인 전사자의 두 배에 가까운 12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1945년 원폭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종전 직전까지 미군과 일본군이 대치했던 오키나와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패전 직후 미군 지배하에서 주민의 의사를 반영한 정당이 결성되는 등 민주주의의 순풍이 부는가 했다. 하지만 곧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대립이 첨예한 냉전시대가 시작되면서 극동 지역의 군사적 요지로서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본토 ‘반환’은 미일 간 복잡한 정치 셈법의 결과였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으로 조속히 복귀하기를 희망한다”는 주민들의 의견이 제출된 것도 사실이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미국의 지배하에 남거나, 일본으로 복귀하거나, 혹은 독립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면, 대량의 핵무기와 대규모의 군사 기지가 상주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오로지 동아시아 지역 최전선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벌이기 위한 전략 기지로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평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였다. 독립을 위해 싸우자는 세력도 있었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꾸리는 것도 역부족인 상황에서 독립 투쟁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더 이상의 전쟁과 폭력은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키나와는 주권을 포기하고 일본 본토에 복귀할 것을 선택했다. 적어도 일본에는 무력을 포기하고 전쟁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 ‘평화헌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패전국에 귀속되면 더 이상 전쟁 폭력에 시달릴 일은 없으리라는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슬로건은 ‘핵무기 없이, 본토와 동등하게’였다. 지역에 이미 배치된 대량의 핵무기를 반출할 것, 일본인과 똑같은 평등한 대우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 이 두 가지가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조기 복귀를 위해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배신감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계기로, 이미 지역에 배치되었던 1,000여 기 핵무기가 철거되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미군 병력은 지금까지도 대규모로 주둔 중이다.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지역에 주일 미군의 70%가 넘는 미군이 배치되어 있다. 앞으로 미군 기지를 축소하겠다는 합의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또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 핵무기를 재배치해도 좋다는 내용의 미일 정부의 비밀 합의 문서의 존재도 드러났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은 반쪽만 실현된 채, 반세기가 흘렀다.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었다. 평화헌법을 수호하려는 시민들도 있지만, 나날이 엄중해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군사력을 갖춘 ‘보통 국가’로 나아가자는 우익의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은 남다르다. 평화헌법을 믿고 일본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평화 기조가 폐기 처분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물거품이라는 한탄이 터져 나온다. 비정한 국제 정치판에서 평화라는 추상적 가치를 굳게 믿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나이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평화나 인권 등 이상주의적인 명분을 헌신짝처럼 던진다면, 과연 정치가 사회에 뿌리내릴 이유가 있겠는가? 오키나와의 불행한 현대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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