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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어루만지는 멜로디, 무언의 위로를 건네다

입력
2022.11.14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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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지난 3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주회를 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준비된 프로그램 연주 전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자 엘가의 '님로드'를 연주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지난 3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주회를 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준비된 프로그램 연주 전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자 엘가의 '님로드'를 연주했다. LG아트센터 제공

방탄소년단의 '봄날'이라는 곡이 있다. '보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곡은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며 보고 싶은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을 시처럼 담백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곡이다. 어느 날 '봄날'의 뮤직비디오를 봤다. 보고 싶다던 친구는 세상을 떠난 모습이었고 남은 친구들의 얼굴에는 상실감과 표현하지 못한 슬픔이 있었다. 그들과 비슷한 또래였을 때 가까운 사람을 잃었던 적이 있다. 그 때문인지 한동안 ‘봄날’의 도입부만 들어도 눈물이 고였다. 이 음악은 각별한 위로가 됐다. 비극을 겪었던 청년의 무거운 마음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준 것만으로 큰 힘이 됐기 때문이다.

가사와 영상을 통해 수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대중음악과 비교할 때 클래식 음악은 가곡과 오페라를 제외하면 구체적 내용을 담은 서사나 표제가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나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등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들은 작곡가가 처음부터 추모를 의도해 쓴 곡은 아니다. 클래식에는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인 '레퀴엠'이라는 형식이 별도로 있다. 하지만 때로는 티 없이 맑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을 때 슬픔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말로 표현하지 못해 응어리졌던 아픔을 천천히 토해내기도 한다.

지난 3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주회를 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준비된 프로그램 연주 전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자 엘가의 '님로드'를 연주했다. 오케스트라 왼쪽에 연주 후 박수를 치는 대신 묵념을 해 달라는 자막이 띄워져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지난 3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주회를 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준비된 프로그램 연주 전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자 엘가의 '님로드'를 연주했다. 오케스트라 왼쪽에 연주 후 박수를 치는 대신 묵념을 해 달라는 자막이 띄워져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정신과 의사이자 음악평론가인 박종호는 저서 '예술은 언제 슬퍼하는가'에서 사회가 안고 있는 슬픔을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위로해 왔는지 진중하게 소개했다.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세상의 밝은 면을 화려하게 비춘 것이 아니라 음지에 묻히고 어두운 그림자에 갇혀 있던 약자의 슬픔에 귀 기울인 것들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가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것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부터 예술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서사와 연출을 담고 있는 가곡과 오페라는 단 한 명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약자들의 죽음을 모두가 주목할 수 있게 다루기도 한다. 베르디의 '리골레토'는 장애 때문에 평생 모멸 속에 살았던 한 아버지의 뒤틀린 복수심이 비극을 낳은 이야기를 담았다. 사회 구조 속에서 불합리한 처우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아픔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와 '나비 부인'에서 다뤄진다. 아이가 부모에게 버려지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는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와 '시몬 보카네그라', 야냐체크의 '예누파', 베르크의 '보체크'에서 소개된다. 자살 이슈를 정면으로 다룬 푸치니의 '토스카'와 '투란도트'에서는 사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찌르고 일깨워 공감과 반성을 이끌어 낸다.

슈베르트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 쓰인 예술만이 가장 큰 감동을 남기는 법"이라고 했다. 평생 외롭게 떠돌았던 슈베르트, 수많은 편견과 힘겹게 싸워야 했던 말러, 귀가 들리지 않아 많은 것으로부터 소외됐던 베토벤, 불안정한 정신세계 속에서 힘겹게 생을 붙잡았던 슈만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상처투성이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상처에 갇혀 있지 않고 음악을 통해 다른 시선을 보여줬다. 그들의 음악이 연주되는 곳마다 감동이 전해지는 이유는 누구보다 힘들고 괴로워했을 이들이 음악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위로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멘델스존, 베르디, 야나체크, 케터 콜비츠, 존 버거처럼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알린 예술가들은 더 많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약자의 편에 먼저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같은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타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한 애통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현실을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집중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만화경이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 공감할 수 없었던 사회의 아픔은 예술 작품 속 약자에게 공감하게 되면서 우리의 시선이 더 이상 이기적인 상태에만 머물 수 없게 한다. 예술이 우리를 치유하는 방식이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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