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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반', ○○라 불릴 뻔…즉석밥 종주국, 한국 아닌 '이 나라'

밥. 소비량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단어다. 그만큼 의미도 다양해 문자 그대로 음식, 즉 물에 끓인 쌀일 수도 있고 끼니나 식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더 확장하면 그런 끼니나 식사를 같이 하는 사회적 상황도 의미한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언제'가 걸리기는 하지만 나름 친밀감의 표현이다. 우리는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 밥이 요즘 우리에게 더 가까워졌다. 예전보다 밥을 더 열심히 해 먹고 있냐고?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예전보다 확실히 밥을 덜 해 먹는다. 통계청의 2023년 양곡소비량조사 결과를 보자. 1인당 연간 양곡(쌀+기타 양곡) 소비량은 1981년 이후 40년 넘게 감소 추세다. 2023년의 양곡 소비량은 64.6㎏인데 30년 전, 즉 1993년의 122.1㎏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그중 쌀 소비량은 56.4㎏으로 전년 대비 0.3% 감소했다. 쌀 소비는 줄고 있지만 즉석밥 덕분에 밥은 예전보다 우리에게 더 가깝게 느껴진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고작 2분만 돌리면 갓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다. 맛과 질감이 솥에 지은 밥에 비해 절대 열등하지 않다. 즉석밥이 우리 식생활, 더 나아가 삶 전반에 워낙 밀착돼 있어 한국이 종주국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게 말한다. 몇 분 안에 완성해 먹을 수 있는 즉석밥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길다. 넉넉하게 잡자면 19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가니스탄 국왕의 사촌인 아툴라 K. 오자이-듀라니가 석유화학 공부를 위해 미국에 정착했다. 어느 날 지인들을 모아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손님들은 치킨 라이스를 입을 모아 칭찬했다. 맛있는 이 메뉴를 더 많은 사람에게 먹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석유화학자이자 생화학자, 원예가로 박학다식했던 듀라니는 손님들의 제안에 진짜로 즉석밥 개발에 나선다. 녹록지 않은 과업이었다. 지금부터 100년 전의 미국에서 쌀은 저장과 조리가 번거로운, 그래서 귀한 식재료였다. 쌀조차 구하기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듀라니는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즉석밥을 개발해 낸다. 들인 세월에 반비례해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쌀, 그러니까 장립종을 부분 조리한 뒤 탈수 및 건조시킨다. 조리는 레시피에 맞춰 준비한 끓는 물에 쌀을 붓고 저어 뚜껑을 덮어 두기만 하면 된다. 개발 연도가 1941년이었으니 시대를 감안하면 정말 엄청나게 획기적인 즉석 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즉석밥 개발을 마친 듀라니는 당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던 손님들의 제안을 따라 더 많은 사람과 나눠 먹을 길을 찾아 나선다. 밥과 냄비, 그리고 휴대용 화로를 챙겨 미국 뉴욕의 식품 대기업 제너럴 푸즈(현 크래프트 하인즈)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간부들 앞에서 '미니트 라이스(Minute Rice)'라 이름 붙인 자신의 즉석밥을 선보인다. 실제 조리는 5분 남짓 걸렸지만 그래도 보통의 쌀로 밥을 짓는 데 드는 15~30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 이런 효율과 잠재력을 믿고 제너럴 푸즈는 듀라니의 레시피를 일곱 자리 숫자의 거금, 즉 100만 달러 단위의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 군용식으로 납품해 효용 및 품질 검증 절차를 거쳤다. 제너럴 푸즈는 1946년 민간 시장에 미니트 라이스를 출시했고, 1949년에는 대대적 광고에 나섰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쌀은 주식이 아니었지만 제품의 간편함이 시대와 잘 맞아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 됐고, 덕분에 호황기를 누리느라 모두가 바빴으니 5분이면 만드는 즉석밥은 잘 팔렸다. 미니트 라이스는 지금도 현역이다. 필자는 1996년부터 26개월간 육군에 복무했다. 전투식량 중 두 종류의 즉석밥이 있었으니, 완전 조리된 밥을 밀봉 포장한 레토르트와 동결건조 밥이었다. 후자는 뜨거운 물을 부어 잠시 두었다가 먹었는데, 간편한 대신 죽도 밥도 아닌 괴상한 질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처음 CJ(현 CJ제일제당)가 개발한 즉석밥도 우리에게 오늘날 친숙한 제품과는 사뭇 달랐다. 일본 즉석밥 시장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사업 가능성을 발견했고 1989년 알파미로 만든 냉동밥을 출시했다. 알파미는 쪄서 더운 바람으로 말린 쌀로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된다. 하지만 맛도 질감도 좋지 않았으니 실패했고, CJ는 사업을 중단했다. CJ는 1993년에도 동결건조미로 즉석밥 시장에 다시 도전했으나 필자가 경험한 군용식 수준이었으니 소비자에게 외면당했다. 다른 업체들도 즉석밥 시장의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냉동 또는 레토르트 제품을 내놓았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대로 즉석밥 시장을 포기하기에는 사회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 1인 가구가 크게 증가했다. 1985년 약 66만 가구였던 1인 가구는 1990년 102만 가구, 1995년 164만 가구로 10년 사이 2.5배 늘어났다. 1인 가구의 특성상 편의성과 신속성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식생활 변화와 직결됐다. 제대로 만든 즉석밥이라면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기혼 여성의 취업률과 전자레인지의 보급률도 높아지는 추세였다. 1980년 375만 명이었던 취업 기혼 여성은 1990년 650만 명으로, 햇반 출시 직후인 1997년에는 710만 명까지 늘어났다. 미국에서 미니트 라이스가 그랬듯 기혼 여성이 취업하자 더 간편한 취사의 욕구 및 수요 또한 늘어났다. 전자레인지 보급률 또한 65%까지 올랐다. 1인 가구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가족 구성원 간의 생활 습관 차이로 식사를 따로 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게 됐다. 이에 맞추려면 취사가 좀 더 간소하고 신속해져야 하는 한편, 반조리 혹은 완전조리 제품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변화에 따라갈 수 있도록 CJ가 세 번째로 선택한 길은 바로 무균 포장밥이었다. 당시 일본은 즉석밥 시장에서 한국보다 10년가량 앞서가고 있었다. 1980년 레토르트밥, 1984년에 냉동밥이 출시됐는데 사실 본격적 성장은 1988년 무균 포장밥이 등장하면서였다. 무균 포장밥은 말 그대로 갓 지어낸 밥을 무균 상태로 포장한 제품이었다. 1995년 CJ는 드디어 무균 포장밥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앞길이 험난해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초기 투자 비용이었다. 쌀을 씻고 밥을 짓는 공정과 더불어 반도체 공장 수준의 클린룸을 갖춰야 밥이 담긴 용기 내외의 미생물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런 설비라면 최소 100억 원은 투자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사내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비용을 줄이고자 당시 대세였던 레토르트밥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안이 검토됐다. 하지만 시장 조사는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그야말로 담백한, 집에서 지은 것과 같은 흰쌀밥이었다. 이런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다면 소비자는 얼마든지 선택할 용의가 있었다. 결국 1996년 CJ는 1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클린룸 및 무균 포장 설비를 구축하고 그해 12월 즉석밥을 출시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햇반의 역사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햇반'이라는 이름은 출시 전 브랜드 선호도 조사에서 꼴찌를 했다는 것이다. '옹솥밥' '밥또' 같은 이름이 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결국 햇반으로 결정됐다. 햇반은 곧 가정과 시장에 정착했고 이후 폭발적 성장을 통해 오늘날 쌀 소비의 버팀목으로 성장했다. 2019년 4,860억 원이었던 햇반 매출은 2022년 8,150억 원까지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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