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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민폐’가 된 그들… 모두를 위한 지하철을 꿈꿔본다

입력
2024.02.17 04:30
수정
2024.02.20 09:22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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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표준 남성'을 위한 도시와 대중교통

프랑스 파리의 시내버스에 휠체어와 유아차가 나란히 타고 있다. 휠체어, 유아차 하차벨도 보인다. 홍윤희 장애인이동권증진 콘텐츠제작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프랑스 파리의 시내버스에 휠체어와 유아차가 나란히 타고 있다. 휠체어, 유아차 하차벨도 보인다. 홍윤희 장애인이동권증진 콘텐츠제작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30여 년 전 유럽에 처음 갔을 때 낯선 언어, 풍경과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젊은 엄마들이 유아차에 아이를 태우고 거침없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장애인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모습도 한동안 낯설게 느껴지다가 곧 익숙해졌다. 특히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낮아지는 출입문과 묵묵히 그들을 돕는 버스 기사들을 볼 때면 코끝이 시큰해지곤 했다. 정차 시간이 좀 길어진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늘 아무도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유아차도 장애인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도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타고 내릴 때 미리미리 조바심을 내며 준비해야 하는 도시에서 온 나는,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돕는 그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후 유럽에서 몇 년간 머무는 동안 도시나 지역에 따라 사정이 다르고 그때 본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긴 했다. 대낮 동네에서 캣콜링을 당하고 버스정류장에서 처음 본 백인 여성에게 백인 남성과 결혼하려고 혈안이 된 아시아 여자 취급을 받으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유아차를 끄는 이들과 아이들, 장애인들 그리고 노인들이 자신의 속도대로 이동하며 마주쳤다가 흩어지는 거리를, 공원을, 버스와 지하철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의 온도가 몇 도는 올라가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도시는 돌, 벽돌, 유리,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때로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을 참은 적도 많았다.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출렁거려서 참 이상하다 싶었다. 나는 아이가 없어 유아차를 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장애인도 노인도 아닌데 왜 그런 장면들을 마주칠 때마다 온갖 감정들이 올라오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생각 끝에 그 장면들이 기억 저편에 묻어둔 동시에 내 몸에 완전히 체화된, 어떤 도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중고교 시절을 보낸 1980년대에는 거리에서 납치당해 ‘인신매매’당한 여자들에 대한 소문이 흉흉했다. 부모님은 집에서 좀 떨어진 고등학교로 배정받아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딸을 위해 통학용 봉고차를 수소문해 주셨다. 여자이기에 취약하며 신체적 성장이 그 취약함을 위험한 현실로 만들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숨을 쉬듯 흡입해야 했다. 거부감이 들었지만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봉고차 비용을 낼 수 없었던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특권’을 누리는 형편에 뭐라고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행동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이젠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다른 과 여학생이 복학생에게 따귀를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몇 번의 성추행을 당한 뒤로는 탈 때마다 친구와 선배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전략이었다.

이 정도는 ‘약과’였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과 동생은 도시의 거리를 그 전과 같은 방식으로 다닐 수 없었다. 임신했거나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에게 도시의 거리는 거칠고, 위험하고, 불친절했다. 버스나 지하철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나둘 차를 사더니 교외로 이사를 갔다. 결국 우리는 전처럼 만나지 못한다.

2001년 8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고 적은 펼침막을 들고 이동권 활동가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제공

2001년 8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고 적은 펼침막을 들고 이동권 활동가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제공

이런 여성들의 도시 경험은 장애인 그리고 노인의 도시 경험과 통하는 데가 있다. 2019년 멀레이지아 구드슨이라는 여성이 미국 뉴욕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사망했다. 딸을 태운 유아차를 들고 가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는 70대 노부부가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리프트를 고정한 철심이 끊어져 추락해 장애가 있던 여성은 사망하고 남성은 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들은 설날을 맞아 서울에 사는 자녀를 만나러 지방에서 올라온 참이었다.

“도시는 돌, 벽돌, 유리,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제인 다크(Jane Darke)의 말이다. 이 말을 모든 남성들이 도시에서 여성들을 지배하며 이득을 본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말은 도시 환경이 소위 ‘일반적, 표준적인’ 남성을 기준으로 해 그들의 경험과 욕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는 의미다. 그 남성은 아이를 태운 유아차를 끌거나 들고 가지 않는다. 남성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남성은 자신의 다리로 계단을 내려가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된다. 비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표준적’인 남성은 자동차 소유자로서 대중교통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진다. 결국 자동차 없이 유아차를 끌고, 몸이 불편한 (실제 남성을 포함한) 이들은, 그들이 지닌 몸의 특징과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 도시에서 때로 죽음으로 내몰릴 각오를 해야 한다. 두 사례는 이 문장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한다.

퇴근 시간대 직장인들은 버스 내 자리 사수를 위해 버스가 정차하기도 전에 먼저 도로로 내려와 줄을 선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퇴근 시간대 직장인들은 버스 내 자리 사수를 위해 버스가 정차하기도 전에 먼저 도로로 내려와 줄을 선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량한 시민, 수백만의 승객’은 누구인가

2001년 오이도역 사건은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이전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서울지하철공사는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엘리베이터 대신 위험한 리프트 확충에만 골몰했다. 그게 돈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오이도 사건 직후인 2001년 2월 휠체어를 탄 장애인 50여 명이 서울역 선로를 점거하고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그해 4월에는 ‘장애인 이동권 연대’가 결성됐다. 이 운동은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에서 저상버스가 의무화된 것도 이 법을 통해서였다.

2003년 1월 22일 박경석 당시 장애인이동권쟁취연대 대표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승강장에서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사고 2주기를 맞아 승강장과 차량 사이의 간격이 넓어 생기는 위험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3년 1월 22일 박경석 당시 장애인이동권쟁취연대 대표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승강장에서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사고 2주기를 맞아 승강장과 차량 사이의 간격이 넓어 생기는 위험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21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시위를 재개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하철역에서 이동하다 사망하거나 다친 장애인들이 계속 나왔다. 그런데도 요구 사항이었던 지하철 엘리베이터 도입, 저상버스 도입, 콜택시 운영 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전국의 여러 장애인단체들이 모여 지하철 역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지금은 ‘개혁신당’ 대표인 이준석은 2021년 당시 이 시위를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겠다는 것”으로 몰아세우고, 서울경찰청과 서울교통공사에 “수백만 승객이 특정 단체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주문하며 주가를 높였다. 그러니까 이동하고자 하는 장애인은 ‘선량한 시민’과 ‘수백만 승객’에 포함되지 않는다. 저 말의 의미는 장애인이 이동하겠다고 나서는 건 ‘민폐’라는 거다.

그리고 이제, 소위 ‘양당체제’를 끝내겠다며 모였다는 새 당에서 제일 먼저 내놓은 정책이 ‘노인 무임승차 폐지’다. 수사가 세기는 하지만 서울지하철공사의 오랜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발상은 일단 높이 산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런가. 수사는 실제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정치인의 수사는 곧 그가 지향하는 정치의 내용이다. 이 말에는 돈 없는 노인이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이동하겠다고 나서는 건 ‘민폐’라는 이미지를 구체화함으로써 ‘청년 정치’의 대변인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굳히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모두의 도시를 위하여

지난 1월 10일 의자 없이 운행하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열차에 시민들이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10일 의자 없이 운행하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열차에 시민들이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노인만 무료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문제라면 발상을 전환해 모두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대중교통은 기업의 상품이 아니다. ‘모든 시민’의 이동 편의를 위한 공공 서비스다. 당연히 시민이 내는 세금이 투입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지하철 비용 구조에는 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포함돼 있지 않다. 이는 개혁신당도 인정한 바다.

자동차는 화석연료를 사용해 온실가스를 배출시키는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대중교통의 수송 분담률을 높이면 그만큼 자동차 이용이 줄어들면서 온실가스 배출도 줄어든다. 교통전문가들의 분석과 주장이다.

나는 상상한다. 도시에서의 안전을 요구하고, 기후위기 해결에 한 발짝 다가서는 대중교통 확충을 주장하는 여성과 남성, 장애인, 아이들과 노인들이 지하철과 버스와 거리를 점거하는 장면을. 우리에게는 모두를 위한 도시를 주장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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